피터 사간. 2010년 프로 무대에 등장한 슬로바이키아의 악동은 굉장한 집중력과 파괴력으로, 때로는 유머 넘치는 행위로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녹색 저지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사이클링 팬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투르 드 프랑스, 포인트 리더에게 수여하는 그린 저지를 2년 연속 획득. 이탈리아의 프로 투어 팀인 캐논데일 프로 사이클링 팀의 막내에서 어느새 간판스타로 발돋움한 피터 사간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산악자전거 선수였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처음 타고 지역 대회에 출전한 이래 10대 후반까지 꾸준히 산악자전거를 타고 레이스에 나갔으며, 2008년에는 주니어 세계챔피언에 올라 레인보우 저지를 입었다. 새로운 산악자전거 스타의 탄생을 예감할 수 있었지만, 당시 피터 사간은 로드 레이스도 병행하고 있었고 어느 한 분야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2009년 슬로바키아의 컨티넨털 팀인 두클라 드렌친 – 메리다(현재는 두클라 드렌친 – 트렉)에 입단하며 로드로 전향함을 알렸다. 컨티넨털 팀에서 1년간 활동한 후 피터 사간은 빠르게 로드 레이스에 적응했다.
거친 노면과 자연지형 그리고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약 1시간 30분 내외로 달리며, 수십 명과 경쟁하는 산악자전거 크로스컨트리와는 달리 로드 레이스는 원 데이 레이스라 하더라도 몇 배의 인원이 동시에 달리고 레이스 시간 또한 훨씬 더 길며, 스테이지 레이스는 더욱더 긴 시간 경쟁해야 한다. 혼자 경쟁하는 크로스컨트리와는 달리 팀을 이뤄 레이스를 해야 하는 등 그동안 피터 사간이 해온 것과는 여러 부분이 달랐다. 그런데 피터 사간은 2009년, 2번의 레이스 우승과 스테이지 레이스에서의 구간 우승을 하는 등 빠르게 로드 레이스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10년, 피터 사간은 캐논데일 프로 사이클링 팀(당시에는 리퀴가스-도이모)에 입단하면서 사이클링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무대로 뛰어오른다.
피터 사간은 프로 무대 데뷔 직후 파리-니스에 출전해 놀라운 스프린트를 선보이며 2번의 스테이지 우승을 기록한다. 투어 오브 캘리포니아에서는 포인트 1위를 달성하고, 그랑프리 몬트리올에서는 2위에 오른다.
이듬해의 사간은 보다 강력해졌다. 투어 오브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라 투어 오브 스위스에서도 포인트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랜드 투어에 출전하게 된다. 무대는 스페인, 바로 부엘타 아 에스파냐였다. 사간은 첫 출전한 그랜드 투어에서 무려 3개의 스테이지에서 우승하면서 팀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다음은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피터 사간이 2012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3개의 스테이지를 우승하면서 파리에서 그린 저지를 입은 것과, 2013년에는 2위와 큰 포인트 차이로 그린 저지를 사수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로드 사이클링계의 슈퍼스타, 피터 사간이 팀 동료들과 함께 2013년 10월 한국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열고, 동호인들과 함께 라이딩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피터 사간이 몸담은 캐논데일 프로사이클링 팀의 국적은 이탈리아이고, 구성 멤버 또한 이탈리아 선수들이 많아서 피터 사간의 이탈리아어 실력 또한 상당했다. 인터뷰는 통역을 통해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
한국팬들에게 첫 인사 중인 피터 사간. 친형인 유라이 사간(가운데)과 이탈리아의 사이클 영웅, 이반 바쏘(오른쪽)도 함께 한국을 찾았다.
캐논데일 프로사이클링 팀은 아시아 투어 중이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갔다가 지금 한국을 방문했고, 이번 주말 사이타마 크리테리움에 출전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피곤하지는 않은가?
“어디 아시아 투어뿐이겠는가.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레이스를 하고, 여러 행사에 참가는 것에는 그동안 충분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경기가 끝나면 2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그래서 지금은 피곤함을 느끼면 안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모아야 할 시기다.”
당신, 잘 생겼다.
“고맙다. 그런데 남자에게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다.”
다른 뜻은 없다. 오해하지 마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을 때, 취재진이 모인 것을 보고 사이클링 팬이 아닌 일반인들은 외국의 스타가 온 줄 알고 물어보기도 했다. 눈치 채지 못했나?
“아마 TV나 잡지 등을 통해 자주 얼굴이 비췄기 때문에 누군지는 정확히 몰라도, 왠지 낯이 익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3 그랑프리 몬트리올에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며 우승을 차지했다. ⓒMark Johnson/Cor Vos
터미네이터, 투어미네이터 등 별명이 많다. 참고로 한국의 팬들은 ‘사간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은 무엇인가?
“터미네이터는 산악자전거 선수 시절에 붙여진 별명이고, 이 ‘터미네이터’가 캐논데일 프로사이클링 팀에 들어와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하면서 ‘투어미네이터’로 바뀌게 되었다. 여러 별명이 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투어미네이터다. 평소의 내 모습과는 거리가 먼 별명이지만, 안장에 올라 경쟁을 할 때는 다른 별명보다 더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2회 연속 투르 드 프랑스 그린 저지를 입었다. 그런데 올해(2013년) 23세로 매우 젊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렇게 젊은 데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당신의 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기대를 품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기대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가?
“팀에 입단한 첫 해, 처음 몇 번의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후 언론으로부터의 극찬이 있었고,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잘 해야겠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생겼다. 하지만 선수생활을 겨우 1~2년 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에서 말하는 그대로 나는 아직 젊다. 그래서 한 번 더 이기고, 점수를 더 따고, 경쟁자를 앞지르려고 눈앞의 것을 쫓으며 순간적인 것에 좌지우지되기 보다는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레이스 중에도 신이 나 있는 표정일 때가 많다. 팬들은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 표정일거다.”
피터 사간은 2014년 24세가 되는 젊은 라이더다. 지금까지 거둔 승리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미래가 더 기대되는 선수다.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사간 파킹이라는 유튜브의 영상이 아주 유명하다. 자전거를 타고 차 위로 뛰어올라 바로 캐리어에 자전거를 고정하는 모습인데, 이런 테크닉은 산악자전거를 탈 때 익힌 것인가. 그리고 산악자전거를 탈 때 익혔던 기술들이 로드 레이스를 할 때도 도움이 되는가?
“산악자전거를 타면서 다양한 테크닉을 익힌 것이 맞다. 자전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들 외에도, 크로스컨트리를 하면 로드에 비해 짧지만 더 급한 언덕을 만나게 된다. 이런 언덕은 매우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데 이런 점들이 로드 레이스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산악자전거 레이스를 한 것은 테크닉을 높여준 점에서도 좋았을 뿐 아니라,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2013년 투드 드 프랑스를 보니 전년도보다 견제가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런 것은 어떻게 극복하나?
“견제가 있다는 것은 그 선수가 뛰어난 경기력의 소유자이고,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력이 없는 선수는 주목과 시기도 받지 못하니까. 그래서 견제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기 보다는 내 영향력이 크고, 내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 좋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게는 좋은 자극이 된다.”
2013 투르 드 프랑스 스테이지 7에서 스프린트로 스테이지 우승을 거머쥐는 장면. ⓒBettiniPhoto
일반 사이즈보다 탑튜브가 2㎝ 더 긴 자전거를 타는데 그 편이 몸에 더 잘 맞나?
“내 몸이 평균과 조금 달라서다. 신장에 비해 하체가 조금 짧은 편이고, 그에 비해 상체는 긴 편이다. 탑튜브가 길어야만 제대로 된 포지션이 나온다. 캐논데일은 커스텀 지오메트리로 내 경기용 자전거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지금 타는 수퍼식스 에보는 내 의견이 반영된 커스텀 바이크이다. 자전거를 몸에 맞춘 것이라고 보면 된다.”
피터 사간의 수퍼식스 에보 하이 모드. 피터 사간의 자전거는 커스텀으로 제작한 것이다. 일반 모델과 다른 점은 탑튜브가 더 길다는 것. 피터 사간은 자신의 상체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길기 때문에 탑튜브를 2㎝ 연장해달라고 했다고. 프레임 사이즈는 54㎝(시트튜브)인데 탑튜브의 길이는 58㎝이다.
미래의 프로 사이클리스트를 꿈꾸는 어린 선수들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자전거에 민감한 편인가? 밀리미터 단위의 변화도 바로 알아차리는 선수가 많다고 들었다.
“그렇다. 나도 레이스 바이크의 세팅에 민감한 편이다. 레이스 시즌이 시작되면 모든 세팅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 필요한 세팅이 있다면 레이스 이전에 마무리를 해야 하고, 여기서 변화가 일어난다면 곧바로 눈치를 챈다.”
UCI가 로드 레이스에 디스크 브레이크의 사용을 허가해준다고 하면 어떨 것 같나.
“산악자전거는 디스크 브레이크의 성능이 절대적이다. 현재 디스크 브레이크 외에 더 나은 브레이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로드바이크에 디스크 브레이크는 아직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디스크 브레이크를 경험해 보지 못한 라이더는 더 무섭지 않을까?”
당신의 조국 슬로바키아는 어떤 나라인가?
“그동안 유럽 전역,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한국, 중국, 일본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곳을 봤다. 그런데 내가 살아야 할 곳을 고른다면 역시 슬로바키아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하고, 오랜 기간 해외에 머물러도 내게 있어서 집은 슬로바키아이며,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슬로바키아가 가장 편안하다.”
3년 연속 슬로바키아 로드 챔피언, 2년 연속 투르 드 프랑스 그린 저지 등 놀라운 성적을 이어가고 있다. 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겐 영웅일 것이다. 인기를 실감하나?
“일상생활에서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TV나 매체를 통해 노출되는 상황이 많다보니 슈퍼마켓에 가더라도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인기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와 비례해서 안티팬 또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UCI 로드 월드 챔피언십 2013의 스타트라인에 선 피터 사간. 친형인 유라이 사간(오른쪽)도 피터 사간과 함께 슬로바키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BettiniPhoto
피터 사간이 보는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첫 번째 피터 사간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 에디 메르크스가 아닌 첫 번째 피터 사간이 되겠다는 말이 유명하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에디 메르크스에 비유되는 것은 크나 큰 영광이다. 그렇지만 나는 과거의 누군가를 따라가기 보다는 나보다 어린 선수들이 나를 롤모델로 삼아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꿈을 꾸는 선수들이 많아진다면 사이클 선수로서 정말 기쁘지 않겠나?
나의 꿈이라……. 사실 정확히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히 이어간다면 자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멋진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다가오는 시즌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 현재 단계의 내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터 사간은 제100회 투르 드 프랑스에서 그린저지를 입고 파리 개선문 앞에 섰다. 2012년에 이어 두 번째 그린 저지다. ⓒBettiniPhoto
언제나 쾌활한 피터 사간. 모두를 즐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 연관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