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 사이클리스트, 박선호

인터뷰천생 사이클리스트, 박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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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신용윤

초유의 폭염이 찾아왔던 8월. 가만히 있어도 구슬땀이 떨어지는 날씨인데, 트레이너 위에서 비 오듯 땀을 쏟는 라이더들을 어르고 달래며 채근하는 목소리가 있다.

“자! 기어를 조금 무겁게 바꾸세요. 지금부터 전력질주를 합니다. 앞으로 20초!”

“페이스 늦추지 마시고! 온 힘을 쏟아 내세요.”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 박선호 책임 코치의 목소리다. 불과 1년 전만해도 대한민국 사이클 국가대표이자, 엘리트 선수들 사이에서도 내로라하는 스프린터였던 그가 사이클 동호인들의 훈장님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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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이클 국가대표에서 동호인 지도자로 변신한 박선호를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에서 만났다.

국가대표에서 동호인 지도자로

대다수 엘리트 선수가 그렇듯 박선호 코치도 중학교 시절 사이클에 입문했다. 스스로 “평범하고 특별한 것 없었다”고 주니어 선수시절을 회고하는데, 그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겸손이 지나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고등부 시절인 2001년, 스테이지 레이스인 직지찾기 국제도로사이클대회에서 두 번이나 스테이지 우승을 거두었고, 그 해 아시아선수권에선 단체추발 아시아 주니어 신기록을 수립한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다고 했던가. 이후 그의 경력에서 단체추발과 도로 스테이지레이스는 빼놓을 수 없는 종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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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선수 시절, 중장거리 선수였던 박선호는 트랙에선 개인추발과 단체추발에 두각을 나타냈고, 도로에선 뛰어난 스프린터로 활약했다.

2003년 서울시청을 시작으로 경북체육회, 의정부시청 등에서 엘리트 선수생활을 한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2014년 말까지 9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첫 국가대표에 발탁된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아쉽게도 예비선수가 되어 출전하지 못했지만,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선 단체추발 금메달, 2014 인천아시안게임 단체추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2010년부터 4년 연속 아시아선수권 단체추발을 석권하는 등 우리나라 트랙 중장거리에선 보배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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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도로경기에서 여러 번 스테이지 우승을 거둔 박선호는 해외 컨티넨털 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사진은 2012년 박선호가 오스트리아 컨티넨털 팀인 아르뵈 게부루더의 임대선수로 있을 당시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선호.

트랙뿐만 아니라 도로경기에서도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국내 시즌 도로경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투르 드 코리아에서만 통산 7번의 스테이지 우승을 한 바 있다. 또한 해외 컨티넨탈 팀에 임대선수로 활동할 당시엔 UCI 컨티넨털 투어에서 여러 번 스테이지 우승을 거뒀던 뛰어난 스프린터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이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는데, 이듬해 2015 시즌을 마치고 홀연히 은퇴를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마자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사이클 피트니스클럽을 열어 동호인 지도자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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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인 지도에 여념이 없는 그에게서 이제 제법 완숙한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한 여름,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에서 만난 박선호는 몇 달 전과 사뭇 달랐다. 지난 1월 사이클링센터를 열 때 봤던 그는 군대에서 전역해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처럼 쑥스럽고, 주뼛주뼛한 모습이었는데 이젠 제법 완숙한 사이클 코치의 모습이 보인다.

한 여름, 땀 냄새 물씬 풍기는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도장 훔쳐서 사이클 입문

– 박선호가 사이클을 만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사이클에 입문할 당시는 IMF 구제금융으로 온 국민이 힘겨워하던 때였어요.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했던 때인데, 어린 마음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아서 무척 답답했었죠. 그런데 사이클부 선생님 말씀이 사이클부에 지원하면 자전거도 주고, 수업도 자주 빠진다는 거예요. 공부에 큰 관심이 없고, 어려서부터 자전거 타는 걸 좋아했던 제게 그 말은 ‘자전거 줄 테니 공식적으로 놀아봐’라고 들렸던 거죠. 그런데 부모님께 운동선수를 한다고 하면 반대하실 게 분명했기 때문에 어머니 도장을 몰래 훔쳐서 동의서에 찍어 제출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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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떠나 오랜만에 만난 박선호는 선수시절 뿜어내던 카리스마 대신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풍겼다. 털털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내는 그에게서 진솔함이 묻어났다.

– 주니어 시절에는 어떤 선수였나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 같은데, 운동할 때 그런 성격이 도움이 됐나요?

평범했어요. 운동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훈련할 때는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놀고. 딱히 남들보다 사이클을 더 열심히 탔던 건 아니에요.

굳이 누군가를 이기겠다거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아닌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중요한 대회에는 집중력이 높았죠.

전 사람이 매사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상황과 시기에 맞게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게 제 지론인데요. 그런 점 때문에 기회만 엿보는 기회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겉으로는 대충하는 것 같은데,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도 있었고요. 하하

–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다고 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은퇴까지 18년이 넘었고, 국가대표만 9년을 했어요. 현역 시절 가장 뜻깊은 추억과 가장 아쉬운 기억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 스스로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추억은 2009년 서울시청 소속일 당시입니다. 투르 드 코리아 단양에서 양양 구간 경기였는데요. 아시다시피 전 스프린터입니다. 베스트스프린터를 노리고, 라스트 스프린트에 집중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초반 브레이크어웨이에 동조하게 됐어요. 선두가 10명 정도였는데, 난다하는 팀에서 한 명꼴로 나왔었지요.

그런데 구룡령에 들어서며 같은 팀의 클라이머 공효석 선수가 추격그룹에서 리딩그룹으로 넘어 온 거예요. 전 스프린터였지만 어차피 종합순위와는 먼 사람이었기에 공효석 선수의 도움선수를 자처했어요. 결승선까지 공효석 선수와 호흡을 맞췄고, 결국 옐로저지를 공 선수가 입게 됐죠. 스프린터가 클라이머의 도움선수를 했다는 게 스스로 어찌나 뿌듯했던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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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 가장 아쉬운 기억이 2014 인천아시안게임 단체추발경기라고 말한다. 단체추발은 역대로 금메달을 낙관하던 종목이었는데, 자신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 은메달에 그친 것 같아 동료들에게 미안함이 컸다고.

그리고 가장 아쉬움이 남는 기억은 인천아시안게임이에요. 당시 주장인 장선재 선수가 예선 중에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제가 대신 투입된 것이었는데 은메달에 그쳤어요. ‘은메달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제 개인적으로나 한국 사이클 국가대표에게 있어 단체추발은 주종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인천아시안게임 이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4년 연속 우승했던 종목이고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아내와 장인어른에게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요. 저 때문에 2등을 한 것 같아서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아쉬움이 많았던 경기였어요.

100만 킬로미터에 숨은 이야기

–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결혼식을 뉴질랜드에서 올렸던데요. 남다른 연애담이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쑥스럽네요. 그냥 평범한 연예 결혼이었어요. 우연히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소개받은 친구였는데,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제 이상형이 이지적인 여성인데, 아내가 딱 그렇게 보였어요. 사실 선수들은 숙소생활에다가 시즌 스케줄 때문에 연애가 힘들어요. 때문에 연애에 곡절도 많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하니 얼마나 애틋했겠어요. 무엇보다 마음이 잘 맞았고, 결혼에 있어서도 같은 생각이었죠.

뉴질랜드에서 결혼한 것은 아내가 공부한 곳이고, 연애시절 그 곳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결혼하면 많은 이들이 축복해줄 테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뜻깊고 좋아하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죠. 결혼식장이 뉴질랜드다보니 경제적으로 벅찼고요(웃음). 많은 분들을 모시는 것도 불편해서 절친한 지인들만 참석했었습니다. 아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운동선수에서 은퇴한 지금 가장 좋은 건 아내와 같이 보내는 시간 많아졌다는 거예요. 주변에서는 신혼시절 부부싸움도 많다던데, 저희는 말다툼도 안 해요.

– 결혼도 했으니 안정되게 선수생활을 더 지속했을 법도 한데, 갑자기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어요. 전 선수시절 선수로서 제 몸으로 뽑아낼 퍼포먼스는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기로는 인천아사안게임 때가 한계였을 겁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경기력을 소모하는데요. 저와 친하고 비슷한 나이인 장선재, 박성백 같은 선수들은 저보다 더 뛰어난 선수기 때문에 그 경기력을 지금도 유지하는 것이지요.

2014년 전후로 운동 손상도 점점 많아졌고요. 허리 디스크가 있었지만 욕심에 1년이나 남들에게 숨기고 경기장에 서기도 했죠. 그런데, 더 버티면 욕심이 아니라 미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은퇴를 할 때,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 때문에 경륜시험도 응시했었는데 떨어졌어요. 그저 아쉬움 때문이지 정말 합격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죠. 실력으로 봐도 최근에 응시하는 새내기들이 저보다 더 뛰어나요. 더구나 중장거리 특기인 제가 억지로 몸을 만들어 단거리인 경륜을 한들 얼마나 버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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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제가 엘리트 선수지도자가 되지 않은 걸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엘리트 선수가 꼭 엘리트 선수지도자가 되어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보람된 일인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은퇴 후 동호인 지도자라는 남다른 결정을 했습니다. 계기가 있다면요.

사실 은퇴가 계기라면 계기죠. 현역시절, 은퇴 후의 고민을 할 때는 대체로 큰 그림이지 구체적이진 않았어요. 막연히 운동선수로서 경험을 살려 일을 하고 싶었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이클 지도자를 생각했습니다.

간혹 제가 엘리트 선수지도자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전 엘리트나 동호인이나 똑같은 열정을 가지고 달리는 사이클리스트라는 생각이에요. 다만 제가 동호인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더 파생성 있는 곳에서 보람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선수였으니 엘리트 선수지도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 들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동호인을 동호인이 지도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막상 엘리트 지도자를 하려고 해도 코칭 스텝을 구하는 팀이 제한적이고, 생활도 현역 선수 때와 달리지는 게 없어요. 그 때문에 은퇴한 운동선수가 각자의 능력과는 다른 일을 하고 사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엘리트 체육보다는 파생성이 큰 생활체육지도자를 선택했습니다.

동호인들의 열정 또한 엘리트 선수 못지않기 때문에 충분히 제 재능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도하는 보람도 클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결론입니다.

–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라는 이름은 어떤 이유로 지었나요?

사실 아내가 지은 이름입니다. 전 평범한 ‘OOO 사이클아카데미’라고만 생각하던 중에 아내가 “당신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사람들이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 언젠가 그 사람들이 달린 만큼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어떨까”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턱대고 회원들의 누적 라이딩거리가 어느 정도 도달하면 유소년 팀에 자전거를 기부해볼까 생각했어요. 근데, 또 아내 말이 “유소년 팀 선수들은 이미 자전거가 있잖아. 하지만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자전거를 사줄 부모님이 없어. 그 친구들 중에 천재적인 사이클리스트가 있을 수 있는데, 자전거가 없어서 자기 재능을 못 찾을지도 모르잖아”하더군요. 그래서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기부해보자고 마음 먹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사람들의 라이딩 거리를 어떻게 취합할지, 그리고 얼마나 누적하면 기부를 할지, 기부하는 대상 단체를 정하는 것이며 세세한 것이 사이클센터를 여는 것보다 생각할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사업이 안정화될 때까지 생각을 발전시키는 건 보류했어요. 대신 잠정적으로 ‘라이딩 마일리지로 기부를 하자’ 그리고 상징적인 거리 100만 킬로미터를 이루면 실천하자는 의미로 이름을 지은 겁니다. 말하기 좀 쑥스럽습니다만 앞서도 ‘파생성’이나 ‘재능을 나눈다’는 말을 했는데요. 그런 것도 다 이런 취지로 했던 말입니다.

늦어도 내년에는 기부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싶은데, 이 인터뷰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의 참여나 조언 부탁드리고 싶어요.

– 그럼, 왜 100만 킬로미터인가요? 현실적인 거리로 와 닿지 않는데요.

물론 아주 먼 거리이지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닙니다. 제가 주니어 시절부터 훈련과 경기로 라이딩 한 거리를 한 번 추산해봤는데요. 50만 킬로미터 안팎이더라고요. 그리고 엘리트 선수라면 대체로 1년에 2만 킬로미터 내외 라이딩을 해요. 사회생활을 하며 틈틈이 라이딩하는 동호인들도 1년에 수천에서 1만 킬로미터를 라이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라이딩한 거리를 합하면 몇 년 안에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난 아직도 가슴 두근거리는 그곳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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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 오픈파티에서 박선호는 자리를 함께한 지인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스스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편지를 읽었다.

– 사이클아카데미를 열고 한 시즌이 지나고 있는데요. 잘한 선택이었나요?

네. 아까도 한 말이지만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에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사이클의 저변인 동호인들에게 제가 아는 무형의 어떤 것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고마운지 모를 겁니다.

– 말했다시피 절친한 선수들이 아직 현역에 있습니다. 국가대표만 9년, 10년을 못 채운 것도 아쉬울 것 같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9년도 저에게는 감사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지금의 현역 선수들보다 훌륭한 선수가 아닙니다. 물론, 심정은 돌아가고 싶어요. 선수라면 누구나 찬란하고 가슴 쿵쾅거리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해요. 다시 긴장감 속에 심장을 두근거리며 시합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인정해야죠. 과거에 찬란한 것이 저라면 현재의 찬란함은 다른 이들의 것인 걸요. 요즘은 너무 긴장감이 없어서 배만 나오나 봐요. 하하

–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 운영은 안정이 되어 가나요?

벌써, 8개월이나 지났네요. 많은 분들이 염려해주고, 호응해주셔서 빨리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기회원들도 부쩍 늘었고요. 회원님들과도 많이 친해진 것 같아요. 친한 회원들께는 말장난도 하는데, 제가 편한 친구들에게는 말장난이 심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가끔 실례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운동할 때는 ‘성심껏 지도한다’고 하시고요. 아무래도 생활체육을 하시는 분들이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운동선수처럼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개인의 성장과 컨디션에 맞추는 편인데, 그런 부분들을 만족해하셔서 회원들이 많이 호응해주시는 것 같아요. 고마운 일이죠.

– 아카데미 오픈파티에서 축하객들에게 편지를 읽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감수성 넘치는 퍼포먼스를 하는 편인가요?

하하. 퍼포먼스나 깜짝쇼(?) 그런 걸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실은 제가 암기력이 약해요. 멋지게 고맙다는 뜻을 말 하려던 건데, 자꾸 입 안에서 맴돌고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글로 써보자고 생각한 거죠. 그렇다고 교장선생님이 읽는 훈화 말씀처럼 지루하게 말하고 싶진 않아서 편지처럼 써진 거죠. 그리고 나머지 다른 이유는 지인들과 그 자리에 모여 저를 응원하는 이들 모두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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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 나설 때의 가슴 두근거리는 긴장감······, 그게 사라진 게 은퇴이후 가장 아쉬운 점입니다. 지금도 다시 돌아가 그곳에 서고 싶지만, 이제 동호인들을 그곳으로 모셔가는 것이 제 소명이겠죠?”

– 박선호가 이끌어가는 100만 킬로미터 사이클아카데미!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우선, 회원 중에 대회나 경기를 즐기려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에게 포디움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게 가장 단기적인 목표지요. 꼭 강팀을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필드에 나가면 계속 의식되고 견제 받는 동호인 팀이 됐으면 합니다.

– 외길이라면 외길 인생입니다. 주니어 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자전거를 탈건가요?

하하. 최근에도 그런 생각 자주했어요. 네, 다시 돌아가고 싶고, 당시로 돌아가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슴 두근거리며 경기에 나서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보단 우리 동호인들을 그 곳으로 모셔 가야죠.

■ 100만㎞ 사이클아카데미 100mankm.blog.me ☎(02)6014-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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