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이른 아침부터 호텔로비에서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다. 자신을 트리곤의 창업자이자 CEO인 에릭 리(Eric Lee)라고 소개한 그는 출근길에 취재진을 태우러 왔다며 자신의 차로 이끈다. 사전에 안내할 사람을 보내겠다고는 했지만 업체대표가 직접 나올 줄이야······.
에릭은 꾸미지 않은 모습에 친근한 인상이었지만 트리곤 본사까지 1시간 여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도통 입을 열지 않아 차 안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본사에 도착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의 말문이 트였다.
“내가 사실 영어 울렁증이 좀 있어요. 아침부터 몽롱한 상태에 영어를 하려니 힘들더라고. 이해해주세요”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취재진에게 회사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로 쉴 틈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언젠가 카본이 스포츠 자전거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확신만으로 4명의 동업자와 시작한 트리곤은 생산라인 근무자만 150명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카본 1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릭에게서 카본 자전거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들어보자.
카본에 대한 믿음
카본 엔지니어 5명이서 합심해 설립한 자전거 브랜드 트리곤은 대만 내에서 카본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업체 중에서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음, 제 나이가 지금 50대 초반이니깐······. 카본을 안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 가는군요.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그런지 연도가 기억나질 않네요. 아마 1990년도, 20대 중반쯤으로 기억합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를 전공했던 저는 군 제대 후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 직장은 자이언트였죠. 그곳에서 처음으로 카본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카본은 현실적인 소재로 평가받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90년대는 알루미늄이 대중적인 자전거의 신소재였고, 고급 소재는 티타늄이 시장을 주름잡는 시대였으니까요. 게다가 카본 기술력도 그리 좋지 않아 생산량이라 할 것도 별로 없었죠.”
카본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시진 않았나요?
“당시 카본은 대부분 연구용이었고, 일부 자전거, 그것도 프레임과 포크에 국한되어 극히 부분적으로 사용됐었죠. 전 카본 하이엔드모델을 제품화하기 위한 연구부서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카본이라는 소재에 대한 인식도 없었을 뿐더러 자전거에 카본이 사용되더라도 최고급 레이스 모델에만 부분적으로 사용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카본 부서에 있던 우리 팀원들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앞으로 카본이 자전거 소재로서 프레임과 포크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변 부품이나 액세서리까지 보다 다양하게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생각보다 카본에 대한 미래가 밝다고 낙관했습니다. 당시 기술은 부족했지만 기술이야 날로 발전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카본이 알루미늄이나 티타늄을 대신할 날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죠. 그래서 같은 부서 팀원들과 과감히 자이언트에서 퇴사해 동고동락하며 카본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1995년, 트리곤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창립 멤버 5명은 카본에 대한 기술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생산부터 출고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했다. 사원을 뽑아 교육시키고, 제품을 출하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1990년대 자전거 시장에서 카본은 현실적인 소재가 아니었고 품질에 대해서 오늘날처럼 신뢰할 수준이 되지 않았다.
초기 사업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를 포함한 팀원들 5명이서 자본을 투자해 공장을 설립하고, 직접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자이언트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카본 제작 공정 설비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인원이 적어서 부서를 막론하고 너도 나도 붙어서 일해야 했죠.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종종 창립멤버들과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당시를 떠올리며 치를 떨곤 합니다. 하하. 그래도 그 때의 열정이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공장 설비를 마치고, 처음엔 카본 OEM 고객들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불행중 다행인건 카본은 최고급 제품에만 들어가는 소재라서 적은 사원수임에도 생산량과 일정에 차질을 빗진 않았죠. 제품 품질에 대해서 꼼꼼히 체크해야 되는 것이 우리 일 중에 가장 큰 부분이었는데, 품질 검증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실행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풀 카본 자전거
카본으로 자전거가 아닌 다른 제품을 만들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대만에는 크게 3가지 스포츠에 카본 제조 기술이 발달해 있습니다. 자전거와 테니스라켓, 골프채를 대표제품으로 들 수 있죠. 특히 카본을 사용한 테니스라켓과 골프채 제조업체들은 대부분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편입니다. 테니스라켓과 골프채에 들어가는 카본 기술이 상당히 비슷한 편이거든요. 반면에 자전거는 테니스라켓과 골프채와는 다른 점이 많아 자전거까지 생산을 하는 공장들은 거의 없습니다. 카본으로 제작한 자전거 부품과 완성차들은 특별한 카본 기술이 필요합니다. 테니스라켓과 골프채에 비교하면 조금 더 복잡한 편이죠. 우리는 그런 카본 제작 기술에 자부심이 있었고, 굳이 다른 분야 제조까지 해서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 자전거에만 집중하는 데에도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하하.”
카본을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자전거 외에도 있었지만 오로지 풀 카본 자전거를 위해 한 우물만 팠다고.
카본 제작의 자부심이 트리곤의 탄생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프레임과 포크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품을 카본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술과 이를 토대로 완성차를 만들어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거였죠. 창립 멤버들도 하루빨리 우리 브랜드로 자전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카본 기술과 아이디어가 실물로 만들어지길 원했습니다.
우선은 제조 기술을 발전시켰고, 제작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아무래도 적은 자금으로 많은 일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효율적인 제조 방법을 강구한 것이지요.”
프레임, 포크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전거 부품을 카본으로 만들고자 아이디어가 나오는 대로 제품화에 들어갔다고.
사업에 있어 나름의 롤모델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카본관련 업체는 아니지만 이탈리아에는 이름 난 자전거 브랜드들 중 적은 인원에 작은 생산라인을 가졌음에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브랜드가 많습니다. 창업 멤버들끼리 의논할 때마다 이런 이탈리아 특유의 브랜드 이미지가 저희를 사로잡더군요. 하도 오래 되기도 했고, 지금은 없어져서 브랜드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작은 공방에서부터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던 이탈리아의 모 브랜드처럼 적은 인원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전거 브랜드가 되길 원했습니다.”
공장이나 사무실 규모가 확장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성장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12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생산라인에만 150명의 직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카본 공정 설비를 확실히 구축했을 때 점차 카본이 자전거 시장에서 활용되는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카본 프레임과 포크 기술은 이미 터득했기에 다른 부품들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핸들바나 안장, 스템 등 카본으로 어디까지 만들 수 있을지 우리의 한계를 시험한 것이죠. 카본으로 제작된 트리곤 자전거 생산량이 점차 늘면서 동시에 OEM 업체들의 주문량도 많아지게 됐습니다. 타 브랜드들의 위탁생산을 하면서 자전거 생산에 대한 노하우도 쌓을 수 있었고, 동시에 카본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성능이 좋은 하이엔드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죠.”
OEM과 트리곤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만드는 OEM 카본 자전거들은 대부분 최고급 제품들입니다. 각각의 브랜드들이 내세우고 싶은 기술들의 집약체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그에 비해 초창기 우린 우리만의 자전거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열망만 있었지 어떤 자전거를 만들어야 트리곤 만의 자전거가 되는지 잘 알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카본 제조 기술을 알지만 지오메트리 같은 자전거만의 기술은 미흡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선 OEM 원청업체들에게 트리곤이 경쟁자가 아닌 파트너로 비춰지길 원했습니다. 카본 자전거가 대중화되지도 않았는데 서로가 경쟁자로서 신뢰를 쌓지 못하고 관계를 망치면 서로에게 나쁜 영향만 끼칠 것이라고 업체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길 원한 겁니다. 대신 우린 우리가 가진 기술을 총동원해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구현해줘야 했죠. 그보다 설득력 있는 건 없으니까요. 보다 확실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는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트리곤은 자체 브랜드를 포함해 여러 브랜드들의 OEM 생산을 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인 트리곤을 운영하면서 OEM 업체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품질에 대한 철저한 검사절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OEM 업체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구체적인 브랜드를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만 고품질, 원활한 생산 그리고 납기. 이 3가지 조건만 충족시켜준다면 가격을 제아무리 높게 불러도 상관하지 않던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품출하 전까지 모든 과정에서 티끌만한 결함이라도 발생할까 신경쇠약이 걸릴 지경이었죠. 그만큼 생산속도도 늦춰졌었는데, 도리어 이렇게 꼼꼼한 점이 타 브랜드에게 알려지면서 위탁업체들이 대폭 늘어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적이 있습니다.”
트리곤의 대표적인 카본 제조기술이라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카본 섬유에 합성수지를 침착시켜서 프리프레그를 만듭니다. 이 프리프레그를 만드는 수지에 미세한 카본 입자(카본나노튜브)를 첨가해서 카본의 강성과 강도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NCC(Nano Carbon Composite)라고 부릅니다. 이 기술은 위탁업체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에릭은 각 공정을 보여주며 카본 기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위탁업체 제품과 관련된 기술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이밖에도 다른 기술적 특징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카본 프레임을 만들 때 몰딩 과정에서 중요한 3가지 요소는 온도, 시간, 압력입니다. 대부분의 카본 제조공정에서 온도와 시간은 업체들마다 비슷한 편입니다. 제조업체들마다 압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는데요. 트리곤은 열성형 시 상당히 높은 압력을 가합니다.
열성형 시에는 프레임 안팎으로 높은 압력을 가하는데요. 프레임 내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는 카본적층 시 내부에 합성수지 공기주머니를 넣는 반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실리콘을 사용합니다. 실리콘은 열에 강하기 때문에 높은 압력과 열을 가해도 쉽게 일그러지거나 변형되지 않아 내부를 균일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시트포스트 같은 경우 프리프레그를 적층할 때 가운데에 실리콘 틀을 두고 적층작업을 하는 거죠. 우린 이 방법을 하이팩트(HIPACT, High Pressure Solid Compaction) 기술이라고 합니다.”
이밖에 프리프레그를 강성과 강도, 수직운동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적층해 승차감, 내구성, 진동흡수 능력을 향상시키는 FDC(Flex Directional Fusion)기술이 있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카본 적층의 구조와 오차 계측을 측정, 제품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FEA(Finite Element Analysis)기술 등이 있습니다.
미래의 카본 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까요?
“앞으로 나올 카본 기술은 강성과 내구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편안한 라이딩을 할 수 있도록 발전할 것입니다. 벌써 우리를 포함해 여러 업체에서 이런 방향으로 시트포스트와 프레임을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단단하면 승차감이 좋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릴 수 있는 기술들이 더욱 다양하게 개발될 겁니다. 또한 라이딩 중 신체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부분인 핸들바나 안장, 페달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 업체에서는 핸들바가 받는 충격을 분산시키는 일체형 핸들바를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으로 카본고유의 물성은 물론 높은 성형자유도를 활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라이더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강성과 내구성을 저해하지 않고도 승차감을 향상시킬 수 있는 카본 기술들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앞으로 트리곤의 경영 방향에 대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많은 자전거 제조회사들이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습니다. 값싼 노동력과 설비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만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카본 자전거를 주력으로 하는 트리곤은 이전할 계획이 없습니다. 보다 싼 가격에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지만 일부러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카본 제조는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만큼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직원들은 분기마다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기 때문에 오랜 경력은 기본이고,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량생산으로 많은 이득을 창출하기보단 확실한 제품 품질을 위해서 꼼꼼한 작업으로 트리곤 자전거를 만들고 싶습니다. 세계 어디서나 트리곤이란 이름 하나로 최고의 품질이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카본 제작에 있어서 작지만 세계 최고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성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