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신용윤
기자가 이민혜를 처음 본 건 2005년 벨로드롬에서였다. 그의 첫 인상, 트랙을 달리는 그 모습은 큰 산과 같았다. 사실 지금까지 이민혜는 산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산이었고 또 누군가는 넘어야하는 산이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산을 오르고 있다. 올림픽이라는 산맥에 옴니엄이라는 봉우리를 오르는 이민혜를 만났다. 그가 오르고 있는 산과 그 산을 바라보게 해준 이들에 대해 들어봤다.
※옴니엄이란?
옴니엄(Omnium)은 프랑스어로 ‘종합’이라는 뜻이다. 옴니엄은 트랙 사이클경기 중 대표적인 기록경기 3가지와 순위경기 3가지, 총 6가지 경기를 한 선수가 연속적으로 치르는 개인경기다. 따라서 ‘트랙 6종 경기’라고도 부른다. 옴니엄을 구성하는 6가지 종목은 플라잉랩, 포인트경기, 제외경기, 개인추발, 스크래치경기, 독주(남자 1㎞, 여자 500m)다.
기본적으로 각 경기의 순위를 포인트로 간주해 그 합산이 가장 작은 선수가 최종적으로 우승한다. 만약 합산 포인트가 동점이면 기록경기의 시간기록합산이 빠른 순으로 순위를 판정한다.
“옴니엄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넘어야하는 고개다.”
스위스 UCI훈련센터에서 꽤 오래 지낸 것으로 안다. 올림픽을 염두하고 UCI훈련센터 행을 선택한 것인가?
‘올림픽을 염두했다’는 말도 맞지만 사실 UCI훈련센터는 2006년 이후로 매년 꾸준히 오가며 훈련을 받고 있다. 재작년 시즌 오프 후에도 UCI센터에 있었고 작년에는 올림픽출전권 획득을 위해 2월 스위스로 출국해서 그곳에서 지내며 월드컵시리즈를 출전했다.
함께 옴니엄 종목에 출전하는 조호성이나 단거리에 출전하는 이혜진, 이은지는 올림픽까지 스위스에서 훈련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먼저 입국했나? 혹시, 외국생활에 적응이 힘들었나?
UCI훈련센터에서 1년 남짓 훈련하면서 몸과 정신력이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월드컵에서 나름대로 목표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UCI훈련센터에서 20일정도 휴가를 주었다. 4월말 입국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훈련환경을 한번 바꿔보자고 생각하고 그대로 국내에서 훈련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혼자 사색하며 지내는 것을 좋아해서 낯선 외국이라고 힘든 점은 없다. 더구나 UCI 코칭스태프들과는 오랜 친분이 있기 때문에 생활이나 훈련적응의 문제는 아니었다.
기록경기, 특히 추발경기에 특출 난 경기력을 보이던 이민혜가 본인도 ‘철인 6종경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힘든 복합경기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옴니엄 경기를 선택한 계기가 있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 후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너무 힘들어 수술 후 은퇴까지 생각했다. 친구들과 감독님의 만류로 트랙에 다시 돌아 올 수 있었지만 목표가 없고 상실감마저 들었다. 뭔가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후배 나아름이 내가 세웠던 3㎞개인추발 한국신기록을 깼다. 그 때, ‘이제 나도 또 고개 하나를 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해 말, UCI센터에서 훈련하면서 옴니엄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했다. 본인은 모를 수도 있지만 후배 나아름은 내게 고마운 사람이다.
“한 순간도 꾀부리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게 매력”
단일 종목 경기를 할 때와 지금 훈련하는 옴니엄을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른가? 옴니엄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지금의 난 가능한 긴 선수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2016년 리오올림픽까지는 선수생활을 하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2018년 아시안게임도. 옴니엄은 내 남은 선수생활을 걸만하다. 사이클을 모르는 내 친구들에게 육상의 근대5종에 빗대어 “100m경기부터 마라톤까지 다 하는 거야”하고 설명하면 “그런 걸 어떻게 해” 한다. 매력이라면 그런 게 매력이다. 단일 종목은 경기를 끝내면 정신적으로 풀어진다. 그런데 옴니엄은 한 순간도 꾀부릴 수가 없다. 훈련도 마찬가지다. 올림픽을 앞둔 지금은 하루에 옴니엄을 이루는 여섯 종목의 중점사항을 하루에 모두 훈련한다. 이를테면 오전에 플라잉랩의 라인훈련과 포인트의 스프린트 훈련을 오후에는 스타트 훈련과 추발을 위한 랩타입 훈련 등을 교차로 하는 것이다. 사실 정신이 없다.(웃음)
웃고는 있지만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나?
사실 UCI센터에서 돌아와 국내훈련을 선택한 것도 스트레스와도 관련 있다. UCI훈련센터는 매우 과학적인 훈련을 한다. 파워미터와 심박계를 차고 와트에 맞춰서 자전거를 타는 등등, 그런 훈련이 필요하고 결과도 바람직하다. 그건 나나 국가대표팀 정도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과학적인 훈련도 좋지만 한 번은 침 흘려가며 미친 듯이 자전거를 타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게 무식한 한국 사람의 방식이고 우리의 정서다. 그렇다고 훈련과정을 이해 못하고 뛰쳐나온 건 아니다. 과학적인 훈련은 선수의 몸을 단기간에 바꿔놓는다. 내 몸도 1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옴니엄에 맞춰 변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으로 내가 내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 그런 시간이고 침 흘리며 자전거 타는 중이다. 덕분에 자신감도 붙었고 정신적으로 강해졌다.
자신감? 이민혜가 벨로드롬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일이 있기는 했나?
내가 자신 있는 종목은 기록경기 쪽이 많다. 하지만 옴니엄에는 순위경기가 절반이다. 아시안게임 포인트 메달리스트기도 한 내가 봐도 유럽에서 순위경기는 살벌하다. 마치 전사들이 출전하는 것 같다. 특히 제외경기는 매 바퀴 혈투가 벌어진다. 그 기세에 처음에는 기가 죽어서 뒤에 있던 선수가 “비켜!”하고 소리치면 무서워서 비킨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코리아! 비켜” 그러면 우리말로 “뭐! 어쩌라고~ 확!”(웃음)
기자가 과거 이민혜의 경기를 보면 순위경기도 무척 잘 했고, 도로경기에서 조차 우승을 자주 거뒀지 않는가? 뭐가 문제지?
(웃음) 그건 우리나라에서고. 게다가 당시 내가 도로경기나 트랙종목의 순위경기를 우승하는 형식은 정해져 있었다. 빨리 뛰쳐나가서 독주를 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순위경기를 개인추발처럼 기록경기화 해버리고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서 우승한 것인데 2010년까지 내 전법은 이런 것이었다. 이런 방법은 외국선수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경기방식은 선수의 경기력을 갉아먹기 때문에 옴니엄처럼 다음 경기를 생각해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경기에 적합한 전법이 아니다. 내가 지난 1년간 UCI센터에서 훈련한 것이 경기별로 시시각각 일어나는 경기상황에 대처하는 경기운영과 전법을 바꾸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스위스에선 실전훈련을 어떻게 하나?
유럽은 지역대회도 트랙경기가 있다. 난 훈련이 목적이기 때문에 포인트나 스크래치에 주니어 남자선수들과 경기를 했다. 주니어라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 녀석들은 내가 여자라고 봐주는 게 없다. 경기 중엔 죽자고 달려든다. 그게 날 배려하는 그들의 방법이다.
“경기, 훈련만 생각한다고? 그게 선수고 이런게 국가대표다”
훈련이 힘든 만큼 올림픽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일 것 같다.
그런 생각도 한다. 옴니엄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단일종목보다 각 경기강도가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각각의 경기가 단일종목의 경기 같다. 사실 점점 강도가 올라간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기대도 된다. 세계선수권에서 돌아와서 3개월, 나도 변했지만 올림픽에서 만날 상대선수들도 변해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어디 한 번 부딪쳐 보자’하는 마음이다.
‘올림픽’, ‘훈련’, ‘경기’ 이런 것 말고 하루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컨디션이 왜 이럴까? 사실 이런 생각도 샤워하면서 다 끝낸다. 컨디션이나 몸 상태에 오래 신경쓰면 더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결국 몸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경기나 훈련의 연장선 아닌가?
어쩔 수 없다. 내가 경기지도자라면, 내가 상대선수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보면 결국 모두 훈련과 경기의 연장인데 그런 생각으로 꽉 찬 게 선수고 국가대표다.
“난 가끔 밤새워 진탕 놀 때가 있다”
사이클, 운동 외에 자신을 잘 노출시키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난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걸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지만 자전거에 오르면 내 성별은 그냥 사이클 선수다. 과민하다고 할 지 모르지만 몸에 해로운 건 미리 차단한다. 먹는 것은 물론 친구와 놀 때도 조금만 더 놀면 해이한 정신상태가 될까봐 바로 귀가할 때도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고 나이트클럽에 가본적도 없다. 그런 걸 말하는 것이라면 난 보수적이다. 또한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절제가 심하면 인간관계도 힘들어지지 않나?
인간관계가 나빠질 정도로 깍쟁이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2008년 갑상선 수술 후 은퇴하려고 했을 때 친한 친구가 정신적으로 많이 도움을 줬다. 아파보니 친구들과 변변한 추억도 없는 지금까지의 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은퇴까지도 생각했던 거다. 친구는 오히려 은퇴를 만류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날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팀 선수들, 감독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알았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 조금 느슨해질 때도 있어야겠다고. 지금은 휴가를 받으면 친구들과 밤새 놀 때도 있다.
밤새? 친구들과 만나면 뭘 하면서 어떻게 노나?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대체로 저녁 6시 정도에 만난다. 친구들이 나를 위해서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는다. 저녁 먹고 24시간 커피숍 같은 곳을 찾아가서 밤새 수다를 떤다. 몇 잔씩이나 커피를 리필해 마시면서 말이다. 해가 뜨면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침메뉴를 시켜먹고 헤어진다. 선수생활을 하면 친구를 매일 만날 수 없지 않는가. 한 번 만나면 이렇게 진탕 논다.
어이가 없다. 상식적으로 저녁 먹고 수다 떨다가 아침에 햄버거를 먹고 헤어지는 것을 ‘진탕’ 논다고 하나? 차라리 친구들과 여행을 해보는 건 어떤가?
거기까진 아직 무리다. 지금까지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았다. 언젠가는 친구들과 여행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있다. 만나서 수다 떨 때도 우리끼리의 여행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결혼한 친구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올림픽 성적이 초라하다면 어떨 것 같나? 그리고 올림픽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도 말해 달라.
지금까지 만난 기자들의 대부분이 올림픽에서의 목표나 각오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올림픽 이후를 물은 건 처음이다. 올림픽은 내가 몸으로 부딪쳐야하는 벽이다. 난 그 벽이 단번에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벽을 허물려는 내 몸짓을 보고 나와 함께 몸을 부딪쳐 줄 이가 생길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아니라도 훗날 누군가는 그 벽을 허물 날이 올 것이다.
올림픽 이후? 마음 같아선 정말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 어쩌면 인천광역시장배대회 출전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이민혜에게 지난 3월, 나아름(2012 런던올림픽 여자도로독주 국가대표)을 인터뷰했을 때의 일화를 말해 주었다.
나아름에게 “롤 모델이나 경쟁자를 말해달라”고 질문했더니, “민혜언니와 제대로 붙고 싶다” 말했노라고. 어쩌면 지금도 이민혜의 몸짓을 보고 함께 가열한 몸부림을 쳐주는 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자와 헤어져 어두운 숙소로 돌아가던 이민혜가 돌아서서 말했다.
“이제 아름이 얼굴을 어떻게 보지요? 낯 뜨거워서···”
※이민혜와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됐지만 나아름은 이민혜의 3㎞ 개인추발 한국신기록을 깬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