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자전거경기연합(UCI)의 심판강사이며 투르 드 프랑스 같은 그랜드 투어의 심판장인 필립 마리엔이 국내 엘리트내셔널 심판강습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글·사진 신용윤
3월 6일 서울 올림픽파크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속에 급히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한 외국인이 택시에서 내려 경황없이 바쁜 걸음으로 호텔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어제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늦지 않기 위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만, 서울의 교통체증이 이렇게 심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지각하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각했네요.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이름은 필립 마리엔(Phillppe Marien). 한국엔 처음이라는 그는 사실 UCI(국제자전거경기연합)의 수석심판강사(심판을 가르치는 심판)이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그랜드 투어 경기의 심판장을 수행한 최고 엘리트다. 그런 그가 첫 한국행에서 온갖 해프닝을 겪고, 비에 젖은 모습으로 처음 보는 한국인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내 이름은 필립 마리엔. 벨기에인이며 UCI의 심판강사다. 사이클국제심판 경력은 1991년부터다. 2011년 투르 드 프랑스의 심판장이었으며 올해 열리는 2012 런던올림픽 도로경기의 심판장으로 내정되었다.
-경력이 아주 화려하다. 국제심판은 전문종목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도로경기가 전문분야인가?
그렇다. 트랙 경기와 사이클로크로스 또한 주 분야다. 혹시 사이클로크로스를 아는가? 안다고? 아무튼 그게 유럽에선 꽤 인기 있는 스포츠다. 이런 경기들의 국제심판이며 도핑검사관이기도 하다.
어떤 계기로 언제 국제심판이 되었나?
사실 나는 자전거 타기를 미친 듯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전거 경기를 좋아해서 젊을 적에 심판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심판은 1991년부터 시작했다. 물론, 선수 출신은 아니다. 본업은 무역업이었지만 지금은 UCI에서 너무 많이 일을 시키고 있어서 심판강사와 국제심판업무에만 치중하고 있다. 한국에 온 이유는 대한사이클연맹 심판들의 엘리트내셔널심판강습을 위해서다.
엘리트내셔널심판이 무엇인가?
엘리트내셔널심판은 1997년 잠정 폐지되었지만 세계 각국 사이클연맹들로부터 요청이 쇄도해 작년에 부활시킨 UCI심판등급이다. 이 등급은 내셔널심판과 인터내셔널심판의 중간 위치로 자국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나 소속국가연맹의 허가를 받아서 국제대회의 심판업무를 할 수 있다. 이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엘리트내셔널 코미셸(사이클 심판을 이르는 말, 불어) 코스’를 이수하고 시험을 봐야한다. 자격을 취득하면 국제심판 코스가 실시될 때 그 강습에도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어이, 미스터 최. 당신 선수시절에 심판에게 항의 많이 했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그런데 이제 자네가 심판이니 참 아이러니하군. 이제 어떤 선수는 경기 직후, 자네에게 와서 심판판정에 대해 항의를 할 거야. 그럼. 이젠 어떻게 하겠나?”
엘리트내셔널심판강습은 우리나라가 몇 번째인가? 다른 나라의 합격률은 어떤가?
에스토니아, 러시아, 벨기에에 이어 4번째다. 각 국의 엘리트내셔널심판코스 이수자 중 합격률은 10%정도다.
우리나라는 선수 출신의 심판이 대부분이다. 당신은 선수 출신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는데, 유럽은 당신처럼 일반인 출신 심판이 드문 편인가?
그 반대다. 나는 아주 평범한 사례다. 선수 출신이나 선수지도자가 심판을 하는 것은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 국제심판 중에 선수 출신이나 선수지도자였던 사람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최근 심판검정에서는 선수나 선수 출신, 선수지도자는 물론이고 사이클연맹의 사무직원도 국제심판지원자격 심의에서 제외대상이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국가에서 일반인 심판지원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선수 출신심판이 많은 것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자전거인구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관심이 생기면 분명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심판이 정에 이끌리면 손가락질 당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이클 경기의 심판장이니 물어보겠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도로경기인 ‘투르 드 코리아’에는 심판과 마셜을 포함해서 도로경기운영에 20~30명이 투입된다. ‘투르 드 프랑스’처럼 큰 대회에는 더 많은 심판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많은 심판들이 함께 일하는가?
뭐라고! 30명? 투르 드 프랑스의 전임심판은 다른 대회와 마찬가지로 단 3명이다. 모터사이클심판도 일반적으로 3명을 넘기지 않지만 투르 드 프랑스는 알다시피 신경이 많이 쓰이는 대회라서 예외적으로 6명이 허용됐다. 그리고 결승심판, 계측요원 등을 모두 합쳐도 12~13명 내외다. 마셜을 합쳐서 30명이라고 했는데, 마셜은 심판이 아니고 조직위소속의 도로통제요원들이다. 심판장은 경기운영통제를 하는 사람이지 마셜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자신의 소관이 아니라 모른다는 뜻, 투르 드 코리아의 마셜 임무자는 대략 12명 내외이니 비슷한 수준으로 보임).
하지만 심판장으로서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마셜에게 지시를 해야 할 때가 있을 텐데.
심판장(PCP, President of Commissaire Panel)은 경기운영통제(Sports Manegement) 임무를 수행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안전은 이벤트디렉터(우리나라는 ‘경기부장’)의 소관이고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이 마셜에게 지시할 일이 없다.
오랫동안 국제심판을 했으니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을 것으로 안다.
난 사이클 심판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선수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선수들과 따로 친분을 쌓다보면 나도 사람인데 정에 이끌리지 않겠는가. 일부 선수에게 정을 주면 심판이 편파적이라고 손가락질 당한다. 그런 심판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통찰력이 있어야해! 모두에게 통찰력이 함께 하기를
이번 교육일정은 3일이었고 당신은 이 시간이 상당히 짧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교육을 토론과 발표형식으로 진행하던데 왜 그렇게 하는 건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나?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하지만 UCI는 세계의 모든 경기의 운영통제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교육방법은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심판은, 특히 심판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수많은 판단을 하고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있어야 하고 연륜도 쌓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생각하고 공부해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발표와 토론은 여러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빨리 공유할 수 있을 방법일 뿐더러 스스로를 시험해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참석자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주고 그에 해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처리하라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한 것이다.
한국의 심판수강생들을 지도해 본 소감은?
열정적이다. 사이클 경기를 위해 이렇게 자신의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UCI의 일원으로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 나도 UCI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이어서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